1984 - 조지 오웰

1. 빅 브라더가 당신을 주시하고 있다

담배나 초콜릿뿐만 아니라 식량의 배급이 이뤄지고 있는 나라 '오세아니아'의 런던에 주인공 '윈스턴'이 살고 있습니다. 그 나라는 '텔레스크린'이라는 쌍방향 화상 장치가 곳곳에 - 심지어는 집안 까지- 설치되어 있고, 어린이들을 '스파이단'이라는 이름으로 부모의 고발자가 되도록 교육하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말 한 마디 조심해야 하고, 성을 내건 웃음을 짓건 주위와 같이해야 하는 나라입니다. 의심받으면 어김없이 사람이 '증발'하기에 끝이 올 때까지는 조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적국과 '골드스타인'에 대한 타협 없고 대책 없는 증오를 키워가는 나라이고, 당의 완전무결함을 위해 통계와 역사를 수시로 조작하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전체주의사회의 모습이기도, 독재정권아래 사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까지 우리 사회도 관제시위를 조장하고, 권력자 비판은 쉬쉬해야 했고, 인혁당사건처럼 사람이 '증발'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나라 인권상황 운운하기엔 좀 버겁다는 생각이 들죠.

아무튼 이 초국가 '오세아니아'에 구호가 있습니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이 중에서 첫 번째와 세 번째 구호의 내용을 요약하고 인용해 볼게요.

2. 전쟁은 평화

초국가 세 나라(오세아니아, 유라시아, 동아시아)가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고, 자족하기에 충분하기에 전쟁을 일으키는 경제적 요인은 노동력에 국한되는 상황입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전쟁인 셈이죠. 그리고 전쟁은 국지전 양상으로 일부 지역에서만 발생합니다.

이런 전쟁이 계속되는 이유는 삼국 모두가 전쟁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물질적 이유로 전쟁은 잉여생산물을 소비함으로 '부'가 하급계층에게 돌아감으로 그들에게 생활의 여유가 생기고 그것이 교육으로 이어지는 상황을 막기 위함 입니다. 즉, 계층사회질서의 유지를 위해 전쟁으로 궁핍을 필연화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정신적 이유로 긴장과 공포, 증오로 내부결속을 강화하기 위함입니다.
결국 계속되는 전쟁은 물질적 정신적으로 현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평화는 그들만의 '평안'을 말함이죠.


[ 옛날의 전쟁과 비교하면 오늘날의 전쟁은 한낱 협잡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서로 해칠 수 없도록 뿔이 엉뚱하게 나 있는 반추동물의 싸움과 같다. 그러나 전쟁이 비현실적이라 해도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전쟁은 잉여 소비재를 소비시키고 계층적 사회가 필요로 하는 독특한 정신적 분위기를 조성하기 때문이다. 뒤에 가서 서술하겠지만 전쟁은 이제 단순한 국내 문제일 뿐이다.

<중략>

하지만 우리 시대의 지배자들은 서로간의 전쟁은 하지 않는다.
전쟁은 이제 지배 집단이 국민을 상대로 벌이는 싸움이며, 전쟁의 목적도 영토의 정복이나 방어가 아니라 사회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는 데 있다. (p. 278) ]


3. 무지는 힘


[ 상층계급은 오랜 기간 권력을 안전하게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만간 신뢰나 효율적인 통치 능력 중 한 가지를 잃거나 두 가지를 다 잃어버리는 순간이 그들에게 닥친다. 그러면 중간계급은 자유와 정의를 위해 투쟁하고 있는 것처럼 가장하여 하층계급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상층계급을 전복시킨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자마자 하층계급을 다시 옛날의 노예 신분으로 전락시키고 스스로 상층계급이 된다. 이때 새로운 중간 계급은 다른 두 계급 중 하나에서 분리되거나 양쪽 계급에서 분리되어 나오는데, 이로 인해 투쟁이 다시 반복되는 것이다. 이 세 계급 중에서 하층계급만이 단 한 순간도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중략>

하층계급의 입장에서 볼 때 역사적 변화란 그들의 주인이 바뀌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p. 282) ]



4. 사람만이 희망일까

스파이단의 일원이 된 자녀들이 부모를 고발케하여 가정을 무너뜨리고, 획일화된 증오에서
낙오되면 '증발'할 위험이 커지는 살벌한 사회, 그리고 당의 완전무결함을 위해 과거를 끊임없이 수정하는 사회에서 '윈스턴'은 "다음 세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요, 저는 지금 우리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을 뿐이에요."라며 말하는 '줄리아'와 사랑에 빠집니다.

전에도 사회에 대한 의문과 불만이 있던 그였지만 이제는 기계가 만든 음악을 멋지게 부르는 아주머니를 새롭게 바라보고, 당이나 국가에 대한 충성보다는 자신에게 충실한 너무도 인간적인 노동자들을 경멸하지 않게 되고 희망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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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DAUM 영화>



영화 <아일랜드>에서 통제되고 남을 위해 죽을 운명에 있는 주인공 남녀는 버그(Bug)가 되어서 그들의 운명과 사랑을 쟁취했습니다. 이 책의 '윈스턴'과 '줄리아'는 사회를 변혁시키는 등불이 될까요?
아니면 그들만이라도 사랑과 생의 쟁취에 성공할까요?

덧 : 왜 평등을 지양하는지에 대한 이유는 가장 중요하다고하면서 설명이 돼있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윈스턴은 '방법은 알지만 이유를 모른다.'고 하는데요 구호들의 설명을 미루어볼 때 계층질서의 유지를 통한 현재체제의 유지가 이유가 아닐까 싶은데 뭔가 다른 이유가 있나 봅니다.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아시는 분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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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Lord of the Flies) - 윌리엄 골딩


전쟁이 만연할 때에, 피난가던 비행기에 타고 있던 소년들이 무인도에 고립되면서 이야기는 시작합니다. 뿔뿔이 흩어져있는 소년들은 생존을 위해, 기대려고 다시 모였습니다. 그리고 몸에 밴 규율을 정하며 어른의 사회를 흉내 냅니다. 리더의 권부인 '소라'의 권위를 인정하고, 선출된 대장 '랠프'를 중심으로 구조를 위한 봉화를 준비하고, 오두막을 짓고, 화장실을
지정하는 등의 일을 하면서 안정을 찾은 듯 보입니다.

그러던 중에 꼬마들의 공상 속에서부터 '짐승'에 대한 공포가 떠돕니다.
'랠프'는 꿈일 뿐이라고 일축하지만 '공포'는 소년들의 주위를 맴 돕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다툼이 발생합니다. 서로 기대고 모이는 것이 본성이라면, 다툼 역시 본능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법 어른 흉내를 내며 안정적인 생활을 지도해왔던 '랠프'와 대장자리를 뺏으려는 '잭'과의 분열이 시작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소라'의 권위가 그렇게 오래 지속된 것이 외려 신기할 지경입니다. 잭은 소라 대신에 사냥의 오락과 고기의 맛으로 소년들을 모아 대장의 자리에 오르기를 바랍니다.

'랠프'와 대립하면서 대장의 힘을 바랐던 '잭'은 사냥을 통해 그 힘에 근접했습니다.
그리고 얼굴에 색칠을 통해 '가면'을 쓴 것처럼 다른 사람이 되기 시작합니다. 랠프의 의장 같은 대장이 아닌 살벌한 전쟁 통의 군인 같은 대장으로 변합니다. 이런 변화  속에서 '괴물'의 실체를 알리려던 '사이먼'과 늘 이성적으로 말하던 '돼지'는 그들의 폭력으로 죽음에 이릅니다. 혼자가 된 '랠프'와 그를 쫓는 소년의 무리들간의 추격전의 긴박함은 '어른 해군'의 등장으로 구원의 빛을 찾으며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소년들의 잔인한 폭력에 모든 감상을 뺏겼습니다.
그리고 막연하게나마 '생존의 욕구(본능)'이 규율(도덕, 종교, 제도)에 우선한다는 사실이 마음 가까이로 다가오더라고요. 저의 불완전한 이해와 감상으로 끝낼 수가 없기에 해설을 인용함으로 글을 마치렵니다.

<해설>을 보니 앙케이트에서 골딩은 <파리대왕>의 주제를 아래처럼 말했다네요


<인간 본성의 결함에서 사회의 결함의 근원을 찾아내려는 것이 이 작품의 주제다. 사회의 형태는 개인의 윤리적 성격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지 외관상 아무리 논리적이고 훌륭하다 하더라도 정치체제에 따라 결정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이 작품의 모랄이다. 마지막의 구조되는 장면을 제외하고선 전편이 상징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어른의  세계가 의젓하고 능력 있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그것은 섬에서의 어린이들의 상징적 생활과 똑같은 악으로 얽혀 있다. 장교는 사람 사냥을 멈추게 한 후 어린이들을 순양함에 태워 섬에서 데려갈 준비를 한다.  그러나 그 순양함은 이내 똑같이 무자비한 방법으로 그 적을 사냥질할 것이다. 어른과 어른의 순양함은 누가 구조해 줄 것인가?> (p. 320)



그리고 제가 '생존의 욕구'라고 막연하게 느낀 것을 '엡스타인'은 '이드(Id)라고 말하고 있네요.


[ 골딩의 베엘제버브는 무질서하고 도덕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사납게 휘몰아치는 <이드(Id)>에 해당하는 시쳇말이다. 이 이드의 유일한 기능은 기숙하고 있는 주인의 생명을 보증해 주는 것인데, 이 기능을 <이드>는 무서울 만큼 일편단심으로 집요하게 수행한다. 이 힘을 우리는 여러 가지로 부를 수가 있겠지만 신학자가 그렸건 정신분석학자가 그렸건 현대인이 그려낸 인간의 초상화는 이 힘이랄까 심령구조를 영락없이 <자연인>의 근본 원리로 포함시켜 놓고 있다. 문명의 교리, 도덕률, 사회적 관습, 자아(Ego), 그리고 지성 자체도 이 작렬하고 제어할 수 없는 힘, 즉 <인간성의 사나움과 수렁>을 가리고 있는 겉치레에 지나지 않는다.

<중략>

이 근원적인 숨은 사나움이 나타나는 것이 이 작품의 주제이다. (p. 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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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 조지 오웰

<잉글랜드의 짐승들>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그런 세상을 꿈꾸던 동물들은 '메이저'가 말한
'반란'을 예상외로 쉽게 성공합니다. 압제와 착취의 손에서 벗어나 모두가 평등한 농장이 되길 바라며 동물들은 계명을 정합니다. 정확하게는 영리한 돼지들이 정하고 다른 동물들은 동의하는 정도죠.


일곱 계명

1. 무엇이건 두 발로 걷는 것은 적이다.
2. 무엇이건 네 발로 걷거나 날개를 가진 것은 친구이다.
3. 어떤 동물도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
4. 어떤 동물도 침대에서 자서는 안 된다.
5. 어떤 동물도 술을 마시면 안 된다.
6.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죽여선 안 된다.
7.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p. 26)


그런데 우유의 행방이 묘연해지는 것을 시작으로 삐걱대기 시작합니다.
나폴레옹이 강아지를 몰래 교육시킵니다.
반대자 스노볼은 축출되고, '회의'는 폐지됩니다.
인간과 거래를 트기 시작하고, 침대에서 자는 동물이 생겨나고, 동물들을 죽이는
일이 벌어집니다. 해서 처음의 계명은 모르는 새 바뀝니다. 아래처럼요.


4계명 어떤 동물도 '시트를 깔고' 침대에서 자면 안 된다.
6계명 어떤 동물도 '이유 없이' 다른 동물을 죽여서는 안 된다.


'반란'에 성공했고, 사람도 없는 농장에 다른 것들이 생기기도 합니다.
반대자들에게 으르렁대고, 처형하는 사나운 개들이요,
나폴레옹의 말을 반복해서 외쳐대는 양들이요,
동물들을 의심스런 통계와 몰래 바꾼 계명으로 설득하는 '스퀼러'요,
나폴레옹을 찬양하는 '미니무스'요

결국 '복서'는 신념에 차서 기쁨으로 헌신하며 일하지만 몸뚱이 마저 팔리며 죽음을 맞이
합니다. 다른 동물들은 이상하게 삶이 고달프고, 무언가 처음과는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반란' 후에 또 다른 반란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소설과 당시 소련의 현실과의 상관관계를 넘어서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에 권력은 항상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권력은 항상 부패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책을 읽는 것처럼 간단하면 좋을 텐데, 현실에서는 돼지는 머리가 너무 좋습니다.
어쩌면 돼지가 되고 싶은 마음 굴뚝인 저는 아는 바도, 정보의 접근성도 그들과 차원이 다릅니다. '복서'같이 살면 모지즈에게 칭찬은 듣겠지만 억울할 테고요, 아직은 양들처럼 살고
싶지도 않습니다. 좋게 봐야 '벤자민' 정도의 미지근한 참여자 정도일 테지요.아래에 정리가 잘 된 <해설>의 부분을 인용해 봄으로 글을 정리합니다.


[ 우화로 읽었을 때의 <동물농장>은 특정의 풍자문맥과 연결된 <동물농장>과는 다른 의미론적 확장을 가능하게 한다. 우화로서의 <동물농장>은 소비에트 체제라는, 한 시대의 권력형식만을 재현대상으로 하는 역사적 정치풍자의 수준을 넘어 '독재일반'에 대한 우의적 정치풍자로 넓어지는 것이다. 이 경우 이를테면 나폴레옹은 반드시 스탈린을, 돼지들은 반드시 볼셰비키를 지시하는 것으로 파악될 필요가 없다. 부패한 독재자는 어느 시대에나 있을 수 있고 권력형 돼지들도 어느 시대에나 있다. 그러므로 나폴레옹은 모든 시대에 있을 수 있는 독재자의 알레고리이고 돼지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을 수 있는 교활한 정예주의 권력집단의 알레고리이다.

<중략>


복서나 클로버 같은 우직하고 성실한 동물들도 반드시 프롤레타리아트로 제한되지 않는 광의의 피착취 대중을 포괄하는 알레고리로 읽힐 수 있다. 소비에트 체제의 역사적 실체가 소멸하고  없는 지금 이 시대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여전히, <동물농장>이 강한 적절성과 호소력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 정치사회의 권력 현실을 부패시키는 근본적 위험과 모순에 대한 항구한 알레고리이기 때문이다. 오웰이 그린 동물농장은 지금의 세계에도 있고 미래 세계에도 있을 것이다.  (p. 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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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들의 도서관 - 김중혁

우리 고장의 도서관에서 김중혁 작가를 초청한다기에 읽어보았어요.
작가는 밤 새 읽을 만한 책은 아니라고 하셨지만, 강연 전에 읽고 싶은 맘은 굴뚝이고 시간은 모자라기에 밤 새 읽었죠.

단편 여덟 트랙으로 된 소설집입니다.
읽다보니 자꾸 이야기 속 인물을 작가와 동일시하게 되네요.
그리고 그 인물들이 제가 되기도 하고요. 그게 소설 읽는 재미겠죠.
읽으면서 표시해 두었던 부분을 강연 후에 다시 보니 영락없이 작가의 모습들이 보이고, 또
닮고 싶어 하는 제 모습도 보입니다. 이어지는 이런 저런 생각들도 있고요.


1. 뒷수습의 상상력


첫 문장을 써놓자 나머지 문장들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매뉴얼을 쓸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내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숨어 있던 문장들이 눈치를 보면서 슬그머니 나타나는 거 같다. 매뉴얼을 쓴다는 것은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발굴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나는 문장 위에 덮인 먼지를 조심스럽게 툭툭 털어내기만 하면 된다. 고고학자가 된 기분이다.  (p. 46 <매뉴얼 제너레이션> 중에서)


강연회에서 작가가 한 말이 있어요.
'뒷수습의 상상력' 첫 문장을 써놓고, 연이어 수습을 하다보면 어느 새 소설이 완성되노
라고 하시네요. 그럼 위에 인용한 부분은 어김없이 작가의 경험이네요.


2. 아무것도 아닌 채로 죽는다는 건 억울하다

<악기들의 도서관>의 첫 문장입니다.
제가 요즘 느끼는 바를 콕 찌르는 문장이라 되뇌어 봐요. 처해있는 상황이나 지위 책임이 각각 달라도, 저 뿐 아니라 다른 분들도 돌이켜 후회하고 아쉬워하며 생각에 잠기게 하는 문장 아닌가 싶습니다.

마침 제가 즐겨듣던 신해철의 <민물장어의 꿈>에도 비슷한 의미의 가사가 있어요.


 하루 또 하루 무거워지는 고독의 무게를 참는 것은
그보다 힘든 그보다 슬픈 의미도 없이
잊혀지긴 싫은 두려움 때문이지만  (신해철 <민물장어의 꿈> 중에서)


'아무것도 아닌 채로 죽는다는 건 억울하다.' <악기들의 도서관>
그리고'몸속에 저장해뒀던 돌덩이를 내려놓기 위해'
'아직은 무른 내 손가락 끝'을 여물게 해야겠습니다. <나와 B>


3. 침 흘리며 공상하듯, 휘적거리며 악몽을 꾸듯

<무방향버스>에서는 끔찍한 악몽을 꾸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엄마가 사라진다는 것은 어릴 적부터 머리가 다 커버린 지금까지 무서운 일입니다. 생각하기 싫은데 가끔 머리에 떠오를 때면 그렇게 끔찍할 수 없어요.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를 읽을 때처럼 눈물 흘리고 싶지 않아 긴장하고 있는데 '무방향버스'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아! 꿈이구나.' 싶습니다.


4. 5 Cm 공중부양의 SF작가

제가 강연회에서 제대로 들었다면 작가는 스스로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앞에서 두 번째 줄에 앉았음에도 확언하지는 못하겠지만요. 8개의 단편소설들을 다시 생각해보면 위의 표현이 참 기막힐 정도로 어울립니다.

저는 8개 트랙의 이 소설을 읽으면서
톡톡 튀는 소재의 소리를 들었어요<매뉴얼 제너레이션>
침울함 속에서 웃음소리를 듣고요 <유리 방패>
어긋날 수도 있는 목표를 삶에 끼워 맞추는 소리 <악기들의 도서관>
그리고 무서운 꿈을 깨우는 "밥 먹어라." 하시는 엄마의 소리도 들었습니다. <무방향버스>

이제는 <펭귄뉴스> 읽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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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회 후 사인해주시는 김중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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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혁 작가 강연


일시 : 2009년 9월 23일 오전 10시
장소 : 충북 중앙도서관 4층 강당
주제 : 문학과 상상력과 박물관



아침 일찍  참석하였습니다. 잠겨있던 강당 문이 열리고 들여 있는 의자를 처음 빼냈으니 첫 번째 참석자 의 영예를 얻었음이 분명합니다.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주로 아주머니 독자 분들이 많네요. 작가의 독자층을 반영한 것인지, 강연시간대의 영향인지는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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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시작 전의 모습>



드디어 시작하는데, 낯선 분이 등장합니다.
백남권 중앙도서관장님의 말씀이 있네요.
학창시절 뙤약볕아래 교장선생님 훈화 듣는 기분이라 피식하고 웃음이 났습니다.
그래도 지방에서 흔치 않은 좋은 강연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했고요,
교장선생님 훈화의 가장 큰 미덕인 짧은 말씀 감사했습니다.

정말로 김중혁 작가의 강연이 시작하나 봅니다.
이것저것 나열식의 말씀을 하셔서 정리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아래에 그 내용을 기록해 봅니다.
번호 목차의 제목을 비롯해 정리를 위해 나름의 편집이 있음을 알려드려요.

1.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람

작가는 어려서부터 '쓸데없는 생각 좀 하지 마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작가가 그 '쓸데없는 생각'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얼마나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지에 대해 말하는 것에
강연 시간의 절반 가까이를 할애했으니까요.

아래와 같은 이런 생각들을 주욱 나열했지요.

* 택시위에 전자 광고판으로 소통을 하면 어떨까?
* 거리의 CCTV로 증명사진 서비스를 하면 어떨까?
* 전국의 도로에 보일러를 설치하면 노숙자도 운전자도 좋지 않을까?
* 난 연말에 올해의 인물을 선정하여 상을 준다.
* 핸드폰에 1천명의 전화번호를 기록하는 메모리가 굳이 필요할까?
* 제목을 뽑아주는 기계가 있었으면 좋겠다.
* 노약자가 타면 나이와 건강 컨디션을 고려해서 적합한 사람의 좌석이 사람을 일어나
   게 하는 '다 일어나' 버스카드.
* 사람 봐가며 표현이 바뀌는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 표지판'
* 인간성 계측 저울?
* '마감'이라는 말을 걸러서 들려주는 '내 귀에 필터'


어쩌면 독자들이 갖고 있을 '쓸데없는 생각'에 대한 고정관념을 강하게 느끼고 그것을
깨주고 싶어서 그리 강조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제가 아직 읽지 못한 <무용지물 박물관> 을 말씀하신건지도요.


2. 김중혁 작가의 글쓰기 - 뒷수습의 상상력

작가는 소설을 쓸 때 첫 문장을 아무렇게나 써놓는다고 합니다.
그 후에 작가가 저지른 일의 뒷수습을 시작한다고 하네요. 그렇게 계속 뒷수습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소설 한 편이 완성돼 있다고 하네요. 교정 작업을 위한 검토 외에 작가는 퇴고를 하지 않는다고도 했습니다.

첫 문장을 아무렇게나 썼다고는 하지만 폴 오스터의 소설 중에서 '내가 물위를 걸었던 것은 열세 살 때였다.'라는 시작이 멋졌다고 얘기하는 걸 봐서는 첫 문장에 공을 들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3. 작가의 글에 대한 자평

작가는 스스로 SF 작가라고 생각한 다네요.
정통 SF는 아니고요, 작가의 표현은 이렇습니다.
'땅에서 5Cm 공중 부양한 SF 작가'


4. 6년의 시간

제가 제대로 들었다면 등단하는데 6년의 시간이 걸렸답니다.
등단하기까지의 노력과 경험담, 실패담 등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질문까지 드렸으나, 제가 질문의 요지를 명확히 말씀드리지 못해서 듣고 싶었던 얘기는 아쉽게 듣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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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후 사인회>



5. 유인물 발췌

A4용지 여섯 쪽에 분량의 유인물을 입구에서 나눠주네요.
제목은 '문학과 상상력과 박물관' 이고, 김중혁 작가가 쓴 글입니다.
강연 시작 전이라 진행자에게 글의 출처를 물었는데, 작가가 보내준 글이란 답변을 받았어요.

앞부분은 1번의 강연내용과 겹치는 부분이 많고요 뒷부분에 '문학과 상상력' 소제목의 부분이 좋아서 인용해 봅니다.


[ "상상력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라고 대학생들이 물어오면 나는 이제
이렇게 대답한다. "생각을 버리지 마세요." 말 그대로, 어떤 생각도 버리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쓸 데 없는 생각 좀 하지 마라."는 것이었다.
쓸 데 없는 생각을 좀 많이 했던 나는 쓸 데 없는 생각을 했다는 자책감에 사로잡혀 앞으론 쓸 데 없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쓸 데 없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 그런 쓸 데 없는 생각을 자꾸 하다 보니 쓸 데 있는 생각까지 쓸 데 없다고 생각하게 됐고, 나중에는 도무지 쓸 데 있는 생각이 뭔지 알 수 없게 됐다. 생각에 관해서는 누구의 말도 믿지 말고, 자신의 판단만 믿어야 한다.

쓸 데 있는 것인지 쓸 데 없는 것인지 판단하지 말고, 생각을 계속 붙들고 있다 보면 언젠가 쓸모없어 보이던 생각들이 나도 모르는 조각이 되어 커다란 밑그림의 한 부분이 되어 있을 것이다. 상상은 한 장의 그림이다. 우리의 머릿속에 떠오른 어떤 이미지이며 한 장의 스틸 컷이다. 문제는 이 그림을 어떻게 움직이는 영상으로 만들어낼 것인가이다. 여러 장의 그림을 얼마나 잘 이어 붙이는가, 얼마나 그럴 듯하게 편집하는가. 그것이 바로 상상력이다.

"상상력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는 질문의 두 번째 대답은 상상 속으로 뛰어들라는 것이다.그림을 이어붙이기 위해서는 그 속으로 뛰어들어 상상 속의 논리를 찾아내야 한다.

우리들의 멋진 상상에 재를 뿌리는 목소리가 들리는듯하다. 뭔가 이야기를 꺼냈을 때, 새로운 아이디어를 얘기했을 때 누군가 이렇게 얘기한다. "그건 너무 비현실적이잖아." 천 번 만 번 백만 번도 더 들었던 이야기다. 나는 아직까지도 '비현실'이라는 것이 뭔지 - 그리고 비현실이 꼭 나쁜 것인지도 - 잘 모르겠다. 상상은 비현실적일수록 좋은 게 아닐까. 상상력이란, 비현실과 비현실을 잇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비현실과 비현실을 이어서 또 다른 비현실을 만들어내는 일, 혹은 그럴 수 없을 것 같은 일들과 그럴 것 같은 이야기들을 한데 뒤섞어서 그럴 듯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상상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


좋은 말씀 들려주신 김중혁 작가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자리를 마련해주신 중앙도서관장님과 진행을 위해 노력해주신 직원분들에게도 감사드려요. 물론 웃음과 박수 그리고 재미있는 질문으로 자리를 풍성하게 해주신 참석자분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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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 신경림 에세이

제목부터 구수해서 인터넷에서 소식을 듣자마자 읽고 싶었던 책이었죠.
읽기 시작해서는 재미있는 내용이었지만 한 호흡으로 읽어내기엔 쉼표가 많은 책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쉼표가 많다는 것은 제가 읽다가 덮어두고 스스로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려보게 하기도 하고, 한 숨도 쉬어가며 읽었다는 것을 말함이에요.
 
이 책을 보시면 크게 두 부로 나누어져있어요.


1 부는 신경림 작가의 어린 시절 이야기입니다.

일제강점기에 다니던 초등학교시절 이야기 말예요.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와지마' 순사가 해방 후에 정주임이라는 이름으로 경찰노릇을 했다는 추억, 제일 먼저 맞아 죽을 것 같다던 교장은 해방 후 국수주의 교장이 되었다가 문교부차관에서 국회의원 까지 지내더라는 씁쓸한 추억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달리기를 못해 맨날 꼴찌만 한다고 '맨꼴'이라는 별명이 붙었다는 실실 웃게 만드는
추억들도 있지요.

작가의 추억담들 가운데 선생님에 대한 기억들도 제법 있는데요.
그 가운데 인상 깊었던 구절을 아래에 인용해 봅니다.


[ 이 선거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그 선거의 뒤치다꺼리를 우리가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선거 연설은 대개 면내의 유일한 광장인 학교 운동장에서 했는데, 끝나고 나면 운동장은 버려진 유인물은 둘째로, 먹다 버린 음식물이며 배설물들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이것을 다 5, 6 학년 아이들이 청소해야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선거 뒤에는 우리가 다니며 장터 여기저기 붙여진 벽보들을 떼고 닦았다.
이에 대해서 담임 앞에서 제일 먼저 불평을 제기한 것은 반장이었다. 담임은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나로서는 할 말이 없다.' 고만 대답했다.

우리는 의논 끝에 교장한테 직접 항의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장터를 돌며 벽보를 떼다 말고 반장과 부반장이 앞장을 서고 교장한테로 몰려갔다.
 얼결에 얘기를 듣고 난 교장은 당황해서 뒤따라 들어온 담임을 향해 버럭 화부터 냈다.
'아니,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쳤기에 이렇게 버릇없이 굴게 하는 거요! 면장과 지서장이 부탁해서 하는 건데 일 좀 한다고 아이들 어디 덧나요?' 담임이 내몰았기 때문에 우리
는 교실로 돌아왔지만, 이 일로 해서 담임은 지역 사회에서 싸가지 없는 교사로 평판이 돌았고, 선생들 사이에서도 저만 잘난 체하는 사람으로 왕따를 당했다는 후문이었다. (p. 124) ]



초중등학교에 다닐 적에 선생님의 전령 또는 수금원 역할에 불과했던 형식적인 반장에 비하면 아이들의 당돌함도 놀랍지만, 작가의 추억 속 선생이란 사람도 참 인상 깊었어요.
당시 사회나 교장의 지시에 대한 반발로 인해서인지, 사람이 순진하고 이상적이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적어도 아이들에게 꾸밈없이 솔직한 점이 좋아 보입니다.
물론 아이들하고 같은 수준으로 솔직하기만 한 것이 선생으로 모자란 점이 된다고 하시면
달리 반박하지는 못하겠지만요.


2 부는 작가가 만났던 작가들이 대거 등장합니다.

소설은 물론이고 시는 더더욱 읽지 않는 저로서는 모르는 이름의 작가도 많이 등장하죠.
추억 속 그들의 가난이 서글프기도 하고, 그들의 우정이 따뜻하고 낭만적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작가들의 생활담에 제가 느낀 감상은 '부러움'과 '혐오'의 짬뽕입니다.
고교시절만 하더라도 좋게 봤을지 모르지만 작가들의 경제적 무능에 거울을 보듯 느끼는
감정은 혐오이고요, 그럼에도 놓치지 않는 작가들의 자긍심이나 지조, 우정에 느끼는 감정은 부러움 입니다.
아래에 그 일화 중 하나를 짤막하게 인용해 봅니다.


[ 집에 가서 한잔 더 하자는 취한 그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버스를 타고 집까지 간일도 여러 번 있다. 버스에서는 다리가 불편한 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이 없지 않았으나 그는 앉는 일이 없었다. 

<중략>

바로 집 앞에 어린이 놀이터가 있어, 집에 닿으면 그는 큰소리로 아이들을 불러내었다.
사 들고 들어온 과자 봉지를 내밀며 아이들 들으란 듯이 내게 말했다. '따로 정원이 있을
필요가 뭐 있어, 여기가 다 우리 정원인데.' 그러고는 아이들이 공부를 잘한다며 내게 인사를 시켰지만, 늘 술이 취해 들어오는 아버지가 불만인 듯 아이들은 과자 봉지만 받아들고 들어가 버리고, 우리는 이웃한 구멍가게에서 소주와 오징어를 사다가 그의 정원 벤치에 앉아 마셨다. (p. 180 구자운 시인 편) ]



그리고 신경림 작가가 만난 작가들과의 일화들 중에서 이문구 작가의 일화를 특히나 기억해 두고 싶네요. 일화를 통해 본다면 이문구 작가는 말만 앞서는 얼치기가 아니기에 본 받고 싶어서 아래에 인용해 봅니다. 그리고 생소한 사투리와 단어때문에 읽기를 그만 둔 '관촌수필'도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 김지하 시인이 '오적' 사건으로 구속되어 있을 때였다. 젊은 작가들 몇이 모여 데모를 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처음 이문구는 극구 반대했다. 다 잡혀 가고 끌려갈 걸 뻔히 알면서 그 짓을 왜 하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기로 결정이 나자 이문구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피켓을 만들고 플래카드를 만들었다. 마침내 거사일이 되었다. 조태일은 막상 겁이 나서 한 삼십 분쯤 늦게 약속장소로 나갔다. 내심 데모가 끝났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한데 현장에는 이문구 혼자만이 피켓과 플래카드를 싸들고 나와 서 있더라는 것이다.

결국 그날의 데모는 모두들 한두 시간씩 늦게 나오는 바람에 불발로 그치고 말았다.
'말로만 진보주의를 내세우는 사람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 조태일의 이문구 평이었다.
이런 사람이었으므로, 70년대 중엽 진보적인 문인들이 표현의 자유를 위해 자유실천문협회를 만들었을 때 처음에는 글쟁이가 글을 써야지 무슨 단체를 만드느냐고 탐탁해하지 않던 그였지만, 일단 만들어진 뒤에는 조태일, 박태순과 등과 더불어 내내 가장 적극적이고 열성적으로 집회며 시위를 주도했다. (p. 214) ]




 

[ 1980년대 중엽 그가 한 신문에 전국을 도는 기행문을 연재하고 있을 때다. 벽초 홍명희의 출생지인 충북 괴산을 가게 되었다. 아직 '임꺽정'이 금서에 묶여 있을 때다. 그는 사진기자와 함께 벽초의 생가를 찾았고 벽초의 선영에 성모도 했다. 뿐만 아니라 동네에서 낫을 하나 빌려 벌초까지 했다. 이것이 말썽이 안 될 수가 없었다.
동네 사람조차 빨갱이네 집이요, 무덤이라고 해서 피하는 터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주민의 신고를 받고 달려온 형사한테 그는 눈을 부라리고 호통을 쳤다.
벽초의 부친 홍범식이 금산 군수로 계시다가 일본의 강제 합병에 항의하여 자결한 사실을 알기나 하냐고, 그런 애국자의 산소가 잡초가 무성하게 그냥 두었으니 너희들이야말로 빨갱이만도 못한 놈들이라고, 그의 기에 눌려 형사들도 그냥 물러가고 말았다. 이문구를 제쳐놓고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는 작가가 없다고 나는 단언했다. 이러니까 그는 북한의 체제를 비판할 자격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마침내는 내 이 말까지 시빗거리가 되었고, 그의 선친이나 형의 얘기까지 끄집어내졌다. 그의 부친과 형은 6.25 당시 좌익으로 몰려 희생되었던 것이다. (p. 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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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오 바디스(Quo Vadis) - 헨릭 시엔키에비츠


10년 전 지금은 유물이 되어가고있는 비디오대여점에서 <쿼바디스>라는 테잎을 본 적이 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의 뜻이라고 하는데 이 한 마디가 감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시계추신자였던 저는 '오래된 영화'와 '뻔 한 내용'일거라는 생각에 보는 것을 미뤄두었습니다. 이제야 민음사의 책으로 읽어보았죠.

읽어보니 좋았습니다.
여전히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말은 저에게 울림을 줍니다.
저에겐 이렇게 들리거든요

'주여 제가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주여 저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여전히 응답은 들리지 않고, 절반 이상 포기한 상태인 저에게도 이 책은 충분히 좋았습니다.

역자인 최성은 교수는 이 책의 대결구도 중에서 로마의 전통사상과 새로운 신앙인 기독교사상의 대립을 얘기합니다. 그리고 저 역시 품고 있는 기독교에 대한 의문들을 페트로니우스와 그 외 등장인물들의 말을 인용함으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1. 기독교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 종교인가


[ 살인을 금하고 있으니 도둑질이나 사기, 위증도 허용하지 않겠지. 그렇다면 교리를 지키며 살기란 쉬운 일이 아니겠군. 그 종교는 스토아학파처럼 올바르게 죽어야 한다는 걸 가르칠 뿐 아니라 올바르게 살라고 가르치고 있다. 나도 재산을 모아 이런 저택에서 이정도 숫자의 노예들을 부리고 살 수 있게 되면, 경우에 따라서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될 수도 있을 것 같군. 부자는 무엇이든지 못할 일이 없으니까. 덕을 쌓고 싶으면 덕도 쌓을 수 있겠지.....그래! 그렇게 생각하면 그 종교는 부자들을 위한 것인데, 그렇게도 가난뱅이들이 신자가 된 까닭은 무엇일까? 도무지 알 수가 없군. 덕이라는 이름으로 두 손을 묶어 놓는 것이 가난뱅이들한테 대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1권 p. 306) - 킬로 킬로니데스의 독백 ]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공공연한 진리가 되고 있는 세상입니다.
비교적 깨끗한 사람들의 죄는 '준법'의 다른 이름이 되어버린 '법치주의'의 칼날아래 찢어발겨지고 잊지 말아야 할 죄를 지은 사람들은 '용서와 화합'을 들먹거리며 도닥이는 세상입니다.  부자들에게 면죄부를 팔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내세를 파는 꽤나 괜찮은 비즈니스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때가 적지 않습니다.


2. 기독교는 지키지 못할 교리로 사람을 억누르는가


[ 게다가 악을 선으로 갚고, 적에게 사랑을 베풀라고 권고하는 교리는 군인 비니키우스에게는 미친 짓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광기 속에는 여태까지 알고 있던 모든 철학을 능가하는 강력한 힘이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광기가 내포되어 있으니 이 교리를 따를 수 없기 때문에 신성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1권 p. 324)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비니키우스의 생각 ]



 

[ "구세주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만약에 너희들의 형제가 너희에게 죄를 범하면 타일러라. 하지만 회개하면 용서하라. 가령 하루에 일곱 번 너희에게 죄를 짓고, 일곱 번 용서를 빌며 돌아온다 해도 너희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그를 용서해 주어라."
(1권 p. 384) - 킬로는 글라우쿠스를 죽이려 했고 그의 처와 아이를 팔아넘겼다. 글라우쿠스에게 베드로가 권하는 말 ]



소설 속에서 또는 성인 대접을 받는 사람들은 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의 진리 앞에서 무력합니다. 과연 누가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용서할 수 있으며, 왼 뺨을 때리는 자에게 오른 뺨을 내밀 수 있겠습니까.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게 인지상정이죠.
소설 속 '크리스푸스'처럼 약한 사람들을 죄인이라 윽박지르며 자신의 필요성을 정당화하는 목회자가 없기를 바랄 뿐 입니다.


3.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

아직 내용을 모르시는 분을 위해 사기꾼 킬로의 부분을 인용하지는 않을게요.

지키기 힘든 교리, 따르기 어려운 명령은 모두 사랑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에서 용서도 자비도 사랑에서 연유되기 때문이죠.
그리고 없는 사람, 눌린 사람, 슬픈 사람이 기독교에 끌리는 것도 사랑이 이유일 겁니다.

사랑하지 못해도 사랑받고 싶고,
용서하지 못해도 용서받고 싶고,
평안주지 못해도 평안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아닐까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주기도문을 해 봅니다.

그리고 극 중의 네로같이 약함에서 오는 잔인함을 없이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크리스푸스처럼 정죄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바울과 베드로처럼 순교의 길을 걷고 싶지도 않으니 어찌합니까.
Quo Vadis Dom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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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로처



테메레르 - 나오미 노빅


책이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아서 책소화불량에 걸린 기분입니다.
제가 직접 구입한 책들을 읽지 않는 요상한 위인인지라 주로 빌려서 봅니다.
그런데 요즘 빌리는 책들도 그대로 반납하기 일쑤여서 '죽'을 먹는 기분으로 읽은 책입니다.

09년 9월 5일 현재 5권까지 출간됐습니다.
거기까지 읽은 느낌은 재미있어요. 유치하다는 감이 없지 않은데요.
판타지의 효시이자 대작이라는 '반지의 제왕'도 그런 느낌이 있었으니, 유치하다는 느낌은 판타지에 익숙지 않은데서 오는 감상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책얘기로 넘어갈게요

1. 18C 초 영국과 프랑스의 교전 시기가 배경입니다.
2. 용들은 크기와 비행능력 지적수준 그 외 불이나 독액을 분사하는 능력이 다릅니다.
3. 지적수준이 다르지만 용들은 사람과 말을 할 수 있습니다.
4. 그 용에 안장을 채우고 승무원이 탑승해서 용들은 공군복무를 합니다.
5. 영국과 달리 중국은 신분의 차이는 있지만 사람처럼 경제활동을 하고 대접받습니다.
6. 테메레르는 중국황실의 용으로 고귀한 혈통이고 지능이 높습니다.
7. 용과 조종사는 강한 애정 또는 소유의 연대의식을 갖고 살아갑니다.
8. 테메레르의 조종사 로렌스는 귀족이며 해군다운 자존감과 꼬장꼬장한 원칙을 지키려
   애쓰는 사람입니다.

읽은 지 좀 지났지만 1권부터 5권까지 중요한 틀이라 생각되는 것만 적어 봤어요.
이 틀에서 테메레르와 로렌스 그리고 많은 인물들이 유럽, 중국, 아프리카, 터키 등을 다니며 좌충우돌하는 얘기가 꽤나 재미있습니다.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 시리즈, 드래곤라자 외에는 판타지를 읽어 본 적이 없어서, 판타지를 좋아하시는 분들의 이 책에 대한 평가가 궁금합니다.
어떠셨나요?


애매모호한 생각, 삐걱대는 머리

이 책에서는 용이 사람과 말을 합니다.
그런데 용끼리 사랑을 나누는 장면은 없어요. 교미만 있을 뿐.
대신 용은 자신이 결정한 조종사와 '애정과 소유의 복합'인 듯 한 감정을 나눕니다.

정리해 보면요.
'로렌스'는 어려서부터 군복무를 해 온 베테랑 해군장교였고, 결투를 마다않는 전형적인 남성입니다. '테메레르' 도 수컷입니다.
그런데 '용과 용이 선택한 조종사의 밀접한 관계' 라는 설정 덕분에, 로렌스와 테메레르의 관계는 묘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연인 사이의 사랑 같은 분위기 말이죠.
거대하고 강한 용이 상대인지라 로렌스가 여성인 듯한 느낌을 받아요.
이 부분에서 제 머리는 약간 삐걱대더라고요.
처음 보는 관계가 무척이나 생경해서 그런가봅니다.

누군가가 개를 사랑하거나 고양이를 사랑하는 것과는 다른 느낌입니다.
아마 '용이 말을 한다.' 는 것이 다른 느낌의 이유일 테죠.


써놓고 보니, '책소화불량' 뿐 아니라 다른 문제도 있어 보여 씁쓸하네요.
그래도 이것 또한 기록이라 생각해서 남겨두렵니다.
전투와 전쟁 이야기가 자주 나와서 그런지 '난중일기' 읽기에 다시 도전해봐야겠다는 의욕이 들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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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로처